제목보도일자
“왜 탐사보도냐고? 권력은 감추고 기성 언론은 못 밝히니까” 한겨레2013.07.01
기사로 이동

는 <뉴스타파> 저널리즘의 모토는 ‘비영리와 독립’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광고를 싣지 않고 시민후원금으로만 운영되고 정파저널리즘을 철저히 배격한다고 밝혔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caption]

이명박 정부의 숱한 폐해 가운데 빼선 안 될 게 <한국방송>(KBS) 김용진 기자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는 2009년 탐사보도팀장에서 팀원으로 좌천된 뒤 바로 지방으로 쫓겨났고, 2010년엔 한국방송의 친정부적 논조를 비판한 언론기고로 정직 4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그는 권력이 감추고 싶어하는, 그러니까 진짜 뉴스를 전하고 싶었다. 2005년 탐사보도팀을 만들어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고위관료 재널리즘 센터’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붙게 됐나.

“지난 대선 직전까지 뉴스타파 시즌 1과 2를 마친 뒤 방향성을 놓고 고민했다. 애초 (뉴스타파가) 탐사보도를 표방하는 독립매체로 시작했으니 조금 더 선명하게 조직의 틀을 그렇게 가져가자고 결정했다. 세계적인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들이 ‘탐사저널리즘 센터’라는 이름을 쓴다.”

- 탐사보도란 뭔가. 왜 굳이 탐사보도여야 하나.

“학계나 업계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누군가 감추고자 하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기자의 독자적 취재로 발굴해서 폭로하고 이를 통해 사회개혁을 추동하는 것이다. 이런 저널리즘 행위다. 다. 비영리를 내세운 것은 기존 언론들이 이윤과 상업 동기에 매몰돼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시민의 자발적 후원으로만 운영된다.”

- 후원회원은 어느 정도인가.

“3만여 명이 매달 회비를 납부한다. 보통 한 명당 만원 정도 낸다. 또 비당파를 내세웠다. 세계적으로 이런(비당파) 모델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 언론의 문제가 정파성 이런 부분이다. 정파적 영향을 받지 않겠언론사의 운영방향에 따라 유동적인 구조다.”

- 호흡이 긴 탐사보도보다는 현안에 초점을 맞추자는 의견들은 없었나.

“비당파, 비정파란 게 객관주의와 결합한 그런 얘기는 아니다.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이쪽저쪽 주장을) 균형있게 배치해 그걸로 역할 다 한 것으로 끝내는 것이다. 그건 아니다. 여러 현안과 이슈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어떤 것이 진실인지 불분명할 때, 취재 인력과 제하자는 것이다. 어떤 정파에 유리한지 판단하지 않고, 발견된 증거에 자신의 가치관이 배치되면 그 가치관을 버리겠다는 것이다. 정파 저널리즘은 골대를 미리 정해놓고 증거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 저널리즘을 배격하겠다는 것이다.”

- 문제의식이 어디를 향하느냐를 놓고도 당파성 논란은 불가피한 것 아닌가. 대선 주자 검증과 같은 경우도 그렇고.

“대선보도의 경우, 유력후보에 대해 검증 자원을 집중하는 것은 상식이다. 지지율이 큰 차이가 나는데 똑같이 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이건 상식의 차원이다. 여야 후보니 균등하게 하는 것은 난센스다.”

- 조세회피처 보도명의로 신탁회사를 쿡 아일랜드에 세워 하와이 아파트 두 채를 샀다. 그걸 구매한 자금이 뭐고, 그걸 매매하고 취한 이득 같은 것들 등 추가로 취재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강원도 경동대 총장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웠다. 자기 아버지가 재단 설립자인데 교비 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가 들어오면서 일본으로 도피할 시점에 만들었다. 뒷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나. 제대로 된 후속보도가 하나도 없다. 기획물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

-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의 공조 토대가 더 단단해졌겠다.

“한국 쪽에선 아직 협회에 가입된 기자가 없다. (이 협회는)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기자들이 개인으로 가입하는 네트워크 형태다. 상근직원 4명의 아주 작은 조직이다. 조직의 힘은 네트워크다. 탐사보도 기자 100여 명이 서로 의미 있는 이슈를 발제하고 몇 개국 이상 걸쳐 있는 이슈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쪽과) 계속 국제공조 프로젝트를 추진하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 협회 관심 사항에 ‘로그 스테이트’(깡패 국가)도 있더라.

“서구 매체들의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한계가 있다.”

- 미국 온라인 탐사보도매체인 <프로퍼블리카>가 퓰리처상을 2년 연속 받기도 했다. 요즘 세계적인 탐사보도 저널리즘 추세는 어떤가.

“기성언론의 탐사보도 조직은 축소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미국) 방송과 주요신문들은 (탐사보도 조직을) 가지고 있다. 탐사보도팀 예산과 인력이 2천년대 들어 급격히 줄었다. 반작용으로 독립적인 탐사보도단체가 나온다. 미국의 비영리탐사보도매체 네트워크인 아이엔엔(INN)이 5년 전 설립됐을 때 20개 회원사였는데, 지금은 70여 개다. 기존 큰 언론사에서 탐사보도 전문 인력과 예산을 줄이니, 기성매체에서 나와 설립한 것이다. 독자나 후원자층도 늘었다. 기성 언론에서 깊이 있는 탐사 보도나 중요한 뉴스를 보기 힘들어지니 독립탐사매체 수용자가 늘어난 것이다.”

- 온라인을 감안하면 탐사보도 기능이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얘기인가.

“루퍼트 머독이 <월스트리트 저널> 인수 때 당시 주필이 항의 사표를 냈는데, 캘리포니아 갑부 허버트 샌들러가 주필에게 돈 줄 테니 탐사보도매체를 만들어달라고 제안해 프로퍼블리카가 만들어졌다. 매우 전문적인 탐사보도 인력을 가지고 일한다. 예전에 온라인 매체 인력이 아마추어적이었다면, 지금은 기성매체의 전문적 인력이 만든다. 유명한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르몽드> 편집국장 출신이 이 매체가 상업자본에 매각되자 항의해 회사를 나와 5년 전 온라인에 비영리 탐사보도매체 <메디아파르>를 만들었다. 유료독자가 7만 5천 명이다. 이 매체가 사르코지가 로레알 화장품 회사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사실과 사르코지와 가다피 커넥션 등을 계속 폭로했다. 사르코지 재선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좌파성향이라고 비판받았으나 좌파 성향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초대 재무장관의 스위스 비밀계좌를 폭로해 사임을 이끌었다. 탐사보도의 전형을 보여줬다.”

- 돈 많은 갑부가 탐사보도의 후원자라니 우리와는 동떨어진 현실 아닌가.

“어떤 측면에선 큰 손 후원자 몇몇보다는 수많은 소액 후원 모델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많은 시민이 직접 후원하고, 또 그들이 확고한 지지층 또는 독자층이 돼 주기 때문에 독립언론의 입장에선 큰 손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더 매력적일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도 비영리 독립언론이 더 많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소액 후원자만으론 한계가 있고 의식 있는 돈 많은 독지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에서도 90년대 이후 벤처나 아이티 붐으로 성장한, 비교적 리버럴한 기업인들이 앞으로 잠재적 후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후원금에 의존한 탐사보도 모델의 지속 가능성에 회의적 시각도 있다.

“비영리 탐사보도전문매체를 염두에 두면서 벤치마킹한 해외매체가 몇 개 있다. 1980년대에 설립된 CIR(Center for Investigative Reporting)과 CPI(Center for Public Integrity)라는 미국의 탐사보도기관이다. 처음엔 구멍가게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CPI의 경우 50여 명의 인력에 연간 예산만 9백만 달러에 이른다. 이들이 생산하는 탐사보도의 수준은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조세피난처 보도로 세상을 뒤흔든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도 바로 이 CPI가 만든 조직이다. 이들이 창립 후 수십 년 동안 공익재단과 독지가의 후원만으로 이렇게 성장해온 것은 이 모델의 가능성을 확고히 입증한 것이다. 프랑스 메디아파르도 사르코지 집권시절 사르코지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할 때마다 유료독자 가입 수가 급증했다고 한다. 좋은 기사를 쓰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그 기사를 보겠다는 독자가 많다는 것을 메디아파르는 입증한 것이다. 사실 경제 상황에 큰 영향을 받는 광고에 의존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안정적인 재정 구조일 수 있다.”

- 현재 언론노조로부터 부분적으로 인적 지원을 받고 있다. 그게 보도의 독립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데.

“언론노조와 인적 교류는 있지만 언론노조가 뉴스타파의 인사나 편집권에 관여하는 일은 없다. 뉴스타파에서 일하는 해직 또는 노조 전임 언론인들은 본부나 지부 노조에서 바로 온 게 아니라 언론노조에 전임으로 파견됐다가 뉴스타파로 재파견되는 형식으로 와 있다. 이런 인적 교류방식은 언론인들이 소속 회사에서 언론자유와 공정보도를 위해 싸우다 일시적으로 해고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원한다면 취재보도 현장을 계속 지킬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두기 위한 것이다.”

- 한국방송에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었나.

“사실 오래전부터 뉴스타파 같은 형태로, 독립된 탐사보도만 하는 매체를 만들어보자 그런 생각이 있었다. 2003년 <미디어포커스> 프로그램을 만들 때 전 세계의 유명한 탐사보도 매체를 소개하는 미니다큐멘터리를 7차례 만든 적 있다. CPI를 보면서, ‘저게 답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퇴사를 결심할 때) 내가 케이비에스에서 뭘 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 같은 공영방송인 <비비시>에서는 사장 인사 때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거의 없다.

“케이비에스를 크게 보면 두 가지가 문제다. 하나는 사장 선임되는 과정이 결국 정치권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권력을 누가 장악하든 정권의 전리품 비슷하게 사장 자리가 취급된다. 수십 년 동안 그랬다.”

- 수십 년?

“노무현 정부 때도 본질적 변화는 없었다. 노 대통령도 (언론고문을 지낸) 서동구 사장 사퇴 파문 뒤 ‘의식하지 않고 했는데 하고 나니까 부끄럽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정권 영향력에 매인 게 가장 큰 문제다. 한국방송은 또 굉장히 관료적 사회다. 정점에 수장이 있으면 관료 체제가 줄을 서는 구조다. 이런 것들이 수십 년 동안 온존됐으니 조직 자체가 굉장히 보수적이다. 변화와 개혁을 굉장히 두려워한다. 자리 지킴 내지는 더 나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그런 것들이 조직 문화로 팽배해 있다. 저널리즘 조직이라기보다는 관료적 조직이다.”

- 비비시도 공룡 관료조직 아닌가.

“비비시도 사장 임명에서 정권에 완전히 독립돼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누가 오더라도 나름대로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저널리즘 그리고 비비시의 가치를 지켜야겠다는 공통된 기풍이 조직 안에 있기 때문이다. 비비시에서 앤드루 길리건 오보 사태로 사장과 이사회 의장이 동반퇴장하는 최악의 사태가 있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총리) 블레어보다 비비시를 믿는다는 답이 더 많았다. 시청자들 역시 비비시를 믿는다.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기반이다. 이런 것들을 케이비에스는 결여하고 있다.”

- 공영방송의 탐사보도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아쉬움이 클 것 같다.

“(한국방송 탐사보도가) 제대로 된 게 2천년대 중반이다. 제작진에게 자율권이 주어지고, 조직이 한때 약간 활발하게 창의적으로 움직인 시점이다. 아이러니는 권력기반이 취약한 정권에선 권력감시나 비판을 제대로 하고, 정말 제대로 비판해야 할 시기에는 하지 못한 것이다. 자괴감이 들었다. 한국방송이 아무리 망가져도 공영방송 시스템 자체가 사라져선 안 된다. 현 한국의 여론지형은 굉장히 기울어졌다. 그나마 바로 잡아줄 거의 유일한 언론기관이 한국방송이다. 제자리를 가도록 잡아야 한다. 여기(뉴스타파)에 있는 사람들의 케이비에스에 대한 애정은 (케이비에스) 내부 사람 못지않다.”

- 엠비 시절, 케이비에스가 프로파간다로서 전두환 시절을 능가하는 솜씨를 발휘했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전두환 시절 케이비에스 뉴스를 통해 5공 정권을 찬양하던 케이비에스 정치부 기자 출신이 사장으로 왔다. 그는 엠비의 언론특보였다. 그리고 정권 찬양 솜씨를 엠비 시절에도 다시 발휘했다. 물론 낙하산 사장 1명의 탓은 아니다. 5, 6공 시절 권력에 맹종하고,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했던 인사들이 케이비에스 내부에 현재까지 온존하고 있고, 후배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면서 케이비에스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인적 구조가 엠비 시절 그 낯 뜨거운 G 20 특집 퍼레이드 등 숱한 선전선동 방송을 만들어낸 1차적 원인이다.”

- 박근혜 정부의 언론 정책은 어떤가. 방송통신위원장, 엠비시 사장 인사 등을 볼 때 엠비 때와 별 차이는 없어 보인다.

“언론을 장악할 의사가 없다는 말이 진정성을 획득하려면 먼저 엠비 때 해직된 언론인들을 원직 복직시켜야 한다. 이들은 모두 엠비의 언론장악에 항거하다 부당하게 해고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전향적으로 나설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방통위원장, 엠비시 사장 인사를 보면 이 정권이 여전히 언론, 특히 방송을 장악해 이미지 조작의 도구로 활용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다. 하지만 제대로 된 거버넌스가 없는 상징조작이나 여론조작을 통한 지지율 제고와 이를 토대로 한 권력 행사는 부시나 엠비 사례에서 봤듯이 결국 나라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해악으로 돌아올 뿐이란 것을 박 대통령도 명심해야 한다.”

- 롤모델로 삼고 있는 저널리스트가 있나.

“국내 언론인은 리영희 선생이다. 리 선생은 사상의 은사 이전에 탁월한 탐사저널리스트였다. 지난 88년 <사회와 사상> 창간호에 발표한 ‘남북한 전쟁능력비교연구’는 논문의 형태를 취했지만 한국 언론사에 가장 뛰어난 탐사보도라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탐사기자로서의 리영희를 조명해볼까 생각중이다. 해외는 시모어 허쉬이다. 그는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미라이 학살을 폭로해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사 교과서에 나오는 전설의 인물이었지만 지난 2004년 나에겐 갑자기 현실이 돼 나타났다. 미군의 이라크 아부그레이브 포로고문 사건을 폭로한 기자가 바로 시모어 허쉬라는 사실을 알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가 60대 후반이었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조로화 돼 가던 나에게 큰 자극이 됐다. ‘아 진짜 기자는 바로 저래야 된다’ 라고. 그래서 바로 미국 워싱턴의 그의 사무실로 날아가 2시간 이상 장시간 인터뷰를 했다. 그는 지금도 주간지 <뉴요커>의 기자로 왕성한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 현장 취재 기자로서 언론인 조갑제를 높이 평가했다. 언제까지 현장 기자로 남을 생각인가.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의 박정희 시절 포항석유 발견 조작설을 파헤친 기사나 1986년 한길사에서 출간한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등은 사실 한국 언론사에 남을 탁월한 탐사보도라고 생각한다. 길을 잘못 들지만 않았다면 한국의 시모어 허쉬가 될 수도 있었던 정말 역량 있는 분인데 안타깝다. 나도 여건만 된다면 60이고 70이고 현장을 지키고 싶다. 기자가 나이가 들면 사무실에 들어앉아 자리를 지키려 하거나 더 윗자리를 욕심내는 풍토는 한국언론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라고 본다. 하도 자리에 연연해 하는 사례를 많이 봐와서인지 연륜 있고 경험 많은 기자가 자리 욕심 대신 기사 욕심으로 현장을 누비는 게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비로소 한국 언론이 정상화되는 시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 예산 감시나 정치후원금과 관련된 탐사 보도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이유는?

“한국에서 탐사보도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예산감시, 공직감시 부분이라고 본다. 끈질긴 취재와 인내가 필요하고, 그 때문에 기성 언론이 등한시해 온 분야이기도 하다. 지난 2008년 중순 사실상 한국방송 탐사보도팀이 해체되고 울산국으로 가서 지방자치체의 예산 문제를 다룬 특집 다큐를 2편 만든 적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한-미 관계나 한-일 관계의 이면을 다룬 비밀외교문서나 기록들을 추적해 발굴하는 일에 흥미가 있다. 정부기관을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를 하고, 또 국가기록원이나 미국 내셔널아카이브, 일본 국립공문서관 등에서 역사의 이면에 잠자고 있던 기록들을 찾아내고, 증언을 확보해 새로운 사실을 알리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도 보람있는 일이다.”

- 진보 언론에 고언을 한다면.

 “상투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언론은 진보냐 보수냐 이전에 진실에 헌신해야 한다. 언론인도 개인적인 신념이나 가치관이 있고, 그것에 지배받기 쉽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나 팩트 앞에서는 자신이 그동안 갖고 있던 선입견이나 선제적 판단을 수정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정파적 속성은 정도는 덜하지만 진보 성향의 언론도 갖고 있다고 본다. 저널리즘이 제구실을 하고 정말 수용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우선 이런 정파성을 배격해야 한다. 물론 선입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공정하게 수집한 증거를 토대로 어떤 사안에 대해 확증을 내릴 수 있다면 명확하게 판단을 내려 수용자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언론의 구실이라고 생각한다.”